자녀가 독립한 뒤 집이 조용할 때

저녁 6시가 이상하게 길어졌다
저녁이 되면 습관처럼 냉장고 문부터 열게 됩니다. 뭘 꺼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예전처럼 여러 사람 몫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걸 뒤늦게 떠올립니다.
저녁 6시에도 아이들이 오지 않는 집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현관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날 것 같아 한 번씩 고개를 돌리지만, 집 안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나 TV 소리만 들립니다.
아이 방도 그대로인데 그 방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루 중 늘 바쁘게 지나가던 저녁 시간이 갑자기 길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건 서운함이 아니라 낯섦이다
이럴 때 마음을 먼저 서운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가 잘 지내는 것이 싫은 것도,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것만도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조용함은 서운함이 아니라 낯섦에 가깝습니다. 오래 익숙했던 가족 사이의 간격이 달라졌고, 내가 아직 그 새로운 거리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집을 떠난 뒤 느끼는 이런 허전함을 두고 빈 둥지라고 이야기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을 겪는 것은 아니고, 홀가분함과 허전함이 번갈아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운 마음과, 이제 나를 다시 챙기려는 마음은 함께 있어도 됩니다.

하루의 리듬이 뜯겨나갔다
생각해보면 하루에는 아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간이 꽤 많았습니다. 아침에 깨우는 시간, 저녁밥을 준비하는 시간, 늦으면 기다리는 시간까지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 일정이 한꺼번에 사라지면 시간이 남는다기보다 하루를 움직이던 축 하나가 빠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루의 리듬을 다시 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며칠 만에 새로운 생활이 익숙해지는 사람도 있고 몇 달 동안 저녁이 어색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 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아이 밥상 대신 내 밥상을 차려본다
거창하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일정에 맞춰 쓰던 저녁에 아주 작은 선택 하나를 넣어보는 것부터 해볼 수 있습니다.
-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 대신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반찬 하나를 꺼내봅니다.
- 집에 바로 들어오던 길이라면 한 정거장 정도 먼저 내려 걸어봅니다.
- 습관처럼 켜던 저녁 뉴스를 끄고 라디오나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봅니다.
처음에는 이런 일도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맞출 필요 없이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저녁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조금씩 생깁니다.
마음이 오래 무겁게 남아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생활의 리듬이 잡히는 경우가 많지만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아이가 없는 집에 익숙해지는 데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몇 달이 지났는데도 밤마다 잠들기 어렵거나, 하루 대부분을 무거운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면 혼자 견디는 일만 계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누군가와 함께 확인해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몇 달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면, 한 번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집이 조용해졌다는 것은 가족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족의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는 뜻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 변화에 맞춰 내 하루를 다시 만드는 데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독립한 뒤 달라진 저녁이 있다면 편하게 이야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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